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는 병자,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중풍환자들이 가득 누워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희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천사가 못에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을 취유 받는 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그 희망을 붙잡고 고통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재난과 참사 그 자체였습니다.

현대인들도 군중 속에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쟁에 치여 삽니다. 예고 없이 재난과 참사가 발생합니다.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 자리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예수님은 이 사람을 갈릴리에서부터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오랜 아픔을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도우셨습니다.

병자는 예수님을 잘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통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예수님은 참사 속에 있는 자의 고통을 공감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지금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겪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유족들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공감하고 함께 울어야 합니다.

2. 용서의 자리에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남자는 죄를 져서 병에 걸렸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이 남자가 죄인이고 예수님을 잘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알아서 치유 받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긍휼하심 덕분에 치유 받습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님니다.

예수님의 사랑 덕분에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합니다. 용서 받았기에 다시 죄를 짓지 않습니다. 회개의 무릎을 먼저 꿇습니다. 이번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이 계속 악화되는 것은 성도가 기도를 쉬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문화가 자꾸만 어두워진 것은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안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직업의 윤리와 소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고통하는 것은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더욱 엎드려 회개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3. 회복의 자리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치유 받은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고통을 전혀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을 어기게 했다는 것만을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고통의 자리에서 아들을 통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은 고통하는 자들과 자신을 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피를 통해 세상은 회복을 경험합니다. 에수님은 모든 눈물을 닦으실때까지 자신의 안식을 보류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소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십시오. 세상의 눈물을 닦아 주는 위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은평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