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의 가치는 황금, 신·구 조화는 평화, 재생도시가 미래를 약속하는 믿음 확신해

 

◈들어서며

가정의 달 5월은 행사와 모임의 연속이다.

해마다 공무국외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혈세낭비’, ‘관광성 외유’로 비추어지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목적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심도 있는 학습이 요구되면서도 바쁜 일정과 의례적 관성으로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위원회별 갈등의 찌꺼기로 인해 심사위원회를 거치면서 더욱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행기간 내내 진중하게 느끼고 꼼꼼하게 기록함에 잠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본 기록문은 국가와 테마 방문지별로 요약 정리하였으며, 본인의 주관을 최대한 줄이고 보편적 서술에 중점을 두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 영국:런던(5.18 ~ 5.19)

11시간이 넘는 오랜 비행 속에 도착한 히드로(heathaow)공항은 한국보다 낮은 기온으로 서늘했으며, 8시 30분을 지나고 있음에도 밖은 환하기만 하였고 마중 나온 호텔버스에 붙어있는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한국어 홍보판을 보니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런던의 첫날은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 면적의 1.2배에 이르면서 인구는 약 800만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리스·로마 시대의 바둑판모양 도로를 만들어 교통 분산의 효과를 기대했으나 교통체증은 서울보다 훨씬 심하다고 하였다. 로마시대로부터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융, 보험, 해운산업의 세계적인 중추도시이자 뉴욕, 도쿄 등과 함께 세계 3대도시로 꼽히고 있다.

런던시는 크게 중심지를 기준으로 West End와 East End로 나뉘는 데 West End는 주로 부유한 상인들의 교외 주택지로 각종 서비스 산업이 집중하여 런던 제일의 번화가를 이루고 있으며, East End는 런던의 부두지역으로 항구와 관련된 창고업과 각종 경공업의 집적지이다.

 

 

 

 

*** 써튼 친환경 주택단지(sutton bedzed passive house town)

써튼 친환경 주택단지(sutton bedzed passive house town)는 런던의 외곽도시인 써튼 자치구에 건설한 영국 최초의 친환경, 저탄소 주거단지로 16,500㎡에 100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가동이 중단된 오수처리 부지에 3층짜리 연립주택 형태의 3개동이 위치하고 있으며, 본 조성사업은 2000년에 시작하여 2002년 9월에 완료되었고 사업주체는 Peabody Trust, Bioregional Deveiopment Group, Bill Dunster Architects 등으로 저소득층, 자선단체, 지역환경단체, 건축사무소, 견적회사, 엔지니어설계회사 등 다양한 주체들이 친환경 도시개발에 협력하였으며, 주택 중 3분의 1이 저소득층에게 임대되고 30%는 Peabody Trust와 입주자가 공동소유하며 나머지 40%만 일반인에게 분양했다고 하였다.

모든 가구를 남향으로 배치하여 태양에너지의 활용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단지 내 열병합 발전기를 설치하여 자체 전력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즉 모든 건물에 패시브 솔라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단계에서부터 에너지 저감과 CO2 저감을 통한 탄소제로도시 개발의 모델로 주목받고 있으며, 일반 가정집과 비교하여 난방 유지비가 10%에 불과하고 전기는 55%, 가스 19%, 물은 44%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일반 건축물에 비해 건축 비용이 10 ~15% 더 소요되었지만, 인근 50㎢ 이내에서 구한 재료를 협업을 통하여 활용했다고 한다.

또한 거주와 사무공간의 연계로 자가 차량 운행을 최소화하고 단지내 주차장은 세대당 1대꼴로 배정하며, 모든 도로는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자에게 우선권을 주면서 대중교통 이용을 극대화하고 렌터카 개념의 공동차량제도(City Car Club) 및 카풀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주민들의 활발한 교류와 공동체 형성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전기 또는 액화석유가스차량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전기차의 에너지 충전소도 제공하고 있다고 하였다.

쓰레기 사용량의 60%가 재활용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86%가 유기농 음식물을 구입하여 섭취하고 있는가하면,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도 깊어 1인당 평균 20명 가량의 이웃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이웃 간의 친밀도가 매우 높으며, 2년마다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주민들의 만족도는 항상 최고점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사를 가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새로 입주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하였다.

건물마다 옥상정원을 꾸며놓아 자연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였고, 건물간 작은 육교가 설치되어 소통의 가교가 되고 있다고 하였으며, 앞뜰의 정원에는 풍성한 화단과 싱싱한 야채들이 가꾸어지고 있었다. 도심 속의 자연, 자연속의 인간, 그리고 이들의 노력을 통한 조화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감동으로 맞이하는 듯하였다.

다만, 본 타운은 온수까지도 바이오매스 보일러를 사용해 데우려 했지만, 소음과 잦은 고장 등 기술적 결함으로 현재는 도시가스를 사용한다고 하며, 전기차 충전기가 10곳에 설치되어 있지만, 영국에서는 전기차가 별로 이용되지 않아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사실과, 실내 거주 공간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과 교육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은평뉴타운을 개발할 때에 좀 더 면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면 이러한 친환경 주택부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았을 까…

 

 

*** 런던 생태 습지 공원(London Wetland Centre)

런던 도심부에 위치한 런던생태습지공원은 총면적이 43㏊ 정도의 인공습지로 2000년에 개장된 이후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세계적인 생태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이곳은 상수원 공급을 위한 저수지였지만 1993년 이후 본래 기능이 사라지게 되면서 활용방안에 대한 논의 끝에 런던 남부의 자연습지를 그대로 재현한 인공습지 공원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재원은 인근 주택지의 개발이익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5년여의 공사기간 동안 인공적인 콘크리트 저수지를 허물어 자연스러운 습지로 만들고 갈대밭과 호수·늪·연못 등 30개 이상의 각종 인공습지와 전체습지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 시청각교육관, 체험학습관, 조류관찰탑, 생태동물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카페, 연회장, 세미나실 등이 있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곳의 운영에 관한 것이다. 운영 자금은 약간의 정부 보조금과 자선단체의 기부금, 그리고 유산상속자의 멤버쉽 자금, EU의 자연보호 관련 자금, NGO 관련 자금을 비롯하여 기업의 지원금 등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성인 1인당 14파운드(24,000원 정도)에 이르는 입장수입은 14명에 이르는 직원의 인건비를 제외하면 모두 인류를 위한 사업에 재투자를 한다고 하였다.

현재 180여종의 조류, 10종 이상의 박쥐, 500종 이상의 나방과 나비류가 서식하고, 특히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데 편하게 걸으면서 조류를 관찰하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양을 재현해 독(Bank)을 세워 강의 침수현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고, 모든 습지는 인공으로 조성했지만 이후에는 모든 관리를 자연 상태로 놓아두면서 과거보다 200배가 넘는 조류가 노닐고 300년에 만에 다시 돌아온 철새가 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순천만 등 한국과도 공동연구를 하고 있으며 10군데 정도의 소센터를 만들어 조류이동 및 서식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방대한 습지가 도시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적 관심사이며, 수많은 습지연구가, 조류연구가, 사진작가 등 연간 20만명 이상이 찾아오고 있는 가하면, 그 중 초등학교 학생 약 22,000여명이 찾아와 학습효과를 높이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방문 중에도 다양한 인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방대원들처럼 안전용 푸른 복장을 입고 줄을 서서 관람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귀엽고 부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부슬 부슬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걸어가면서 오목 조목 만들어진 웅덩이에서 노니는 다양한 새들은 도심속의 천국을 연상케 하였으며, 각 웅덩이 사이사이에는 출입문을 만들어 탐방객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중간의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새들의 노니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언젠가 들렸던 주남저수지와 창녕 우포습지가 반복으로 뇌리를 스치는가 하면, 하얀 안개사이로 불광천 오리떼와 진관동 습지의 처연한 모습이 자꾸만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 도크랜드(Dockland) 재생도시

런던시내를 벗어나 차량으로 30분 가량 동쪽으로 이동하면 도크랜드 지역이 나온다. 템스 강 두부 중심지역으로 그 면적이 2,200ha에 이르며, 배들이 하역작업을 하던 곳으로 17세기 이래 하급 노동자 마을이 주변에 형성되어 영국의 대표적으로 낙후된 슬럼가였으며, 1800년대부터 항만을 중심으로 조선업, 제조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1970년대 신기술의 발전과 컨테이너의 도입에 따른 화물운송방식의 변화로 도크랜드는 경쟁력을 잃어가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부두기능이 완전히 사라지고 10년간 이곳에서 무려 15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지역경제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부랑자가 모여드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대처정부는 이러한 열악한 지역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런던 도크랜드 개발공사(LDDC)를 설립하고 신도시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공사는 확보한 토지를 민간부문에 매각하는 개발방식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지방정부로부터 토지 수용권과 계획 허가권을 이양 받아 민간 개발업자의 적극적인 투자유치를 위하여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척결하고 경전철 등 교통시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방정부와 지역주민들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캐너리 부두(Canary Wharf)개발에 예상치 못한 공공투자비용이 증가되고 대도시권에 대한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이 없었는가 하면, 동 시기에 오피스 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임대료 하락과 공실률 상승을 부추겼다. 결국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1992년 캐너리 부두 프로젝트는 파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크랜드 개발공사가 심각한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민간 투자자로부터 공공투자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지역주민들과 여러 전문가들은 런던 도크랜드의 재개발을 대처 정부 도시 정책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간주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속적인 인프라구축 등 대안 마련과 민자 유치에 대한 각종 혜택, 지역적 특색에 맞는 주택개발, 전통의 가치와 수변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노력의 결과 폐허가 될 정도로 낙후된 항만지역은 세계적 재개발 모델의 명소가 되어 활력이 넘치는 비즈니스 중심지로 거듭 성장, 1,400개의 국내외 기업이 들어섰고, 8만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기업투자지구(Enterprise Zone)로 지정된 캐너리 워프 일대에는 런던을 넘어 세계의 금융메카로 HSBC, 시티그룹 유럽본부, 모건스탠리, JP모건 등을 비롯하여 바클레이스, 로이터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지금도 엔터프라이즈존 사업 등 새로운 모델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도크랜드의 경우, 하나의 지역을 제대로 재구성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였으며, 해외투자를 비롯한 민간자본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주고 갈등과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하는 진지한 노력을 통하여 도시개발 자체를 관광 상품화하여 외부에 적극적으로 홍보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신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모처럼 맑은 하늘이 따가운 햇볕을 내리쬐는 템즈강변엔 세련되고 깔끔한 신사들의 모습이 많아지고 도심을 잇는 조립식다리 건너편엔 빌딩 속을 뚫고 나오는 곱게 채색된 경전철이 보이며, 누르스름한 강가의 부두에는 쉼 없는 크레인들의 공사현장이 살아 역동하는 도크랜드의 현 주소를 부럽게 스케치하고 있었다.

■ 프랑스:파리(5.20 ~ 5.22)

쉬임없이 달려가는 유로스타(Eurostar)는 순식간에 구릉지가 끝없이 펼쳐지는 프랑스 농촌을 지나더니 오후 늦은 시간, 파리 북역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서늘한 가을을 느끼게 하였고, 아직까지 작년 11월에 있었던 파리 테러의 여운이 남아서인지 역 광장 주변엔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곤 하였다.

파리는 프랑스 최대의 도시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아름다운 세느강이 시내를 휘감고 이 강의 중천에 있는 시테섬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면적은 105.4㎢, 인구는 약 28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근교를 포함한 도시적 지역의 인구는 1,000만을 넘어선다고 하였다.

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 꽃의 도시로 불리어지는 파리는 개선문,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이유 궁전 등 거리 거리 마다 수많은 역사와 문화의 박물관이요, 관광의 요람지들로 세계인을 흡인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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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7대학

영국과 마찬가지로 파리의 아침도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학 입구에 도착하자 한국어과 학과장이신 K 교수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국립대학이지만 캠퍼스는 단조로운 아파트 형 공장 같은 건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과거의 제분공장을 재활용하고 있다니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문에서는 경찰인지 학교관계자인지 우람한 체격의 요원들이 철저한 보안 검색을 하고 있었다.

1968년부터 독립적 단과대학에서 발전하여 2007년에 Denis Diderot University라는 이름으로 불려졌고 지금은 명문 종합대학(Paris Diderot)으로 28,000여명의 학생과 2,300여명의 교수진 및 연구진, 1,100여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외국인 학생수는 6,000여명에 이르고 과학, 의학, 문학, 문리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넓고 조금은 허름한 계단을 오르니 동양어학부 층이 나타났다.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학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국어학과는 1970년에 개강된 후 2005년부터 관심이 시작되었고 k-pop 등 한류영향을 받으면서 점점 고조되고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처음에는 구체적인 생각 없이 접근하였다가 차츰 학문적 가치를 인식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으며, 아직까지도 졸업 후에 직업이나 사회활동 영역과 관련해서 공부하는 학생은 많지 않다고 하였다.

본과에는 현재 석·박사를 포함하여 320명이 공부하고 있으며, 금년에는 700명이 신청하였으나 100명으로 제한(50명은 교육청이 추천한 고등학교 졸업자, 50명은 전과 학생)하였다고 한다. 교수진은 한국인 1명, 프랑스인 4명과 원어민 교사, 계약직 전임강사 6명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하였다.

학사과정은 3년으로 한국사, 시, 소설, 정치, 경제 등을 가르치는 데 졸업이 매우 어려워 30%정도만 학위를 받는다고 하였다. 졸업하면 동창회 조직이 없으며, 취업에 대해서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요즘은 교육부나 한국 대사관을 통하여 한국기업에 대한 설명이나 지방대학에서 공부하는 한국어학과 학생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학과사무실은 간소하게 꾸려져 있었으며, 교수연구실이 따로 없어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국비로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회관이나 식당이 거의 없다고 한다. 도서관도 아담하여 한국서적이 약 12,000여권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도서관을 돌아 옥상으로 오르니 한옥을 모형으로 단아한 우리나라의<정원>이 꾸며져 있었는데, 기왓장 처마에는 <용비어천가>와 김소월의 시 <초혼>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어 해가 비치면 청색 바닥에 글씨가 비춰지고 호랑이 그림과 중앙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몇 번이고 고사되어 반복하여 심었다고 한다.

어려운 재원관계로 3년간에 걸쳐 조성된 본 정원은 파리 7대학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정원이며 한국의 혼과 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감동과 전율로 울컥해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또한 본 대학은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께서 「예술·문학·철학·고전학」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한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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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투자청(BUSINESS FRANCE)

본 청은 2015년 1월 프랑스 수출 진흥청과 통합하여 프랑스 기업의 해외활동 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우리의 COTRA(대한무역진흥공사)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70여 개국과 1500여명의 파트너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VIE(기업체 국제 자원봉사자)제도를 관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프랑스 기업들의 국제적 개발을 도우며 수출 및 해외진출을 증진시키고 프랑스 경제의 장점을 홍보하기도 하는 가 하면, 지역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은 지속가능한 투자와 교류를 이끌어 냄과 동시에 국내·외에서 프랑스 관광 및 경제발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 담당을 하고 있다는 일본인 사토카 도네가와 주무관은 한국말을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일본여성 특유의 친밀감으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본 청은 서울에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주별로 담당기관이 배치되어 있어 프랑스와 파트너를 원하는 국가나 기업에 대한 사무실 등을 연결해주고 부지제공, 세금혜택 등 그에 따른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여간 5,000여건의 상담을 취급하였으며 900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취급하였고, 세계적으로 350여개 기업의 프랑스 방문을 주선하였다고 하였다. 한국기업의 경우 두산, 삼성전자, LG, 태평양화학 등의 기업과 교류하고 있으며, 2015년에 5개 기업이 진출을 결정했고, 40여개의 기업이 추가 진출을 희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3년 내 100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삼성전자의 경우 높은 기업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과거 대우전자의 경우 노사관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 입양인 출신인 폴레르 펠르멩 전 중소기업·디지털 경제장관(한국명 김종숙, 현 문화부 장관)과 장뱅상 플라세 상원의원(한국명 권오복)의 성공기며,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시 COTRA와 MOU체결 건에 대해서도 검토 중임을 밝혔다.

계속적인 수출 감소와 저성장 경제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우리 경제의 돌파구는 무엇인지, 그리고 역시 지역경제 활성화와 청년실업 해소 및 어르신 일자리 창출을 위해 온 구력을 집중시키는 우리구의 오늘에 다시 한 번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면서 간담회를 마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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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데팡스(La Defense) 신도시

파리의 아침은 계속 흐리다 빗줄기가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꿈의 도시 라데팡스였다. 파리 중심가의 루브르 박물관과 개선문을 중심축으로 도심에서 8㎞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세느강변에 조성된 본 도시는 행정구역으로는 파리가 아닌 쿠르브부아(Courbevoie), 퓌토(Puteaux).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 속한다.

1958년 미테랑 대통령과 파리당국 등 자치단체로 구성된 라데팡스 개발위원회가 30여년의 장기 개발구상을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곳은 48만평의 땅위에 첨단업무, 상업, 판매, 주거시설이 고층·고밀도로 들어서 있고 고속도로, 지하철, 주차장 등 모든 교통관련 시설(관광버스 제외)은 지하로 배치하였으며, 지상공간은 보행자만의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지난 40여 년간의 일관된 ‘역사적 중심축 연결’이라는 가장 프랑스적인 도시설계 구조를 유지하였다. 즉 <신 개선문>으로 불리워지는 그랑다르슈(Grande Arche)는 1989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10m 높이의 가운데가 뻥 뚫린 기하학적 건물로 만들어져 루브르박물관-콩코드광장-샹제리제거리-개선문을 일직선으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이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별개의 신도시가 아니라 기존 대도시인 파리와의 연계성을 염두해 두었다고 한다.

유럽최대의 업무단지인 동시에 예술적 감각의 건축물과 조형물을 배치한, 미학과 기능을 조화시킨 도시라는 평가와 더불어 관광적 요소가 극대화된 신도시란 점에서 파리주민의 인구분산 효과라기보다는 파리 구도심의 역사적 유물 보존을 위한 업무지구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확 트인 광장 옆에는 커다란 반달형 전시관이 보이고 SAMSUNG Galaxy S7 edge의 광고판이 너무 너무 뿌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가로 1m, 세로 0.6m정도의 석회암 종류의 돌판을 깔아 놓은 바닥에는 순식간에 빗물을 배수하는가 하면, 엄지손가락을 우뚝 세워놓은 세자르, 철재로 신기하게 조형하여 배치한 작품에는 아이들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느껴지며, 깃발이 나부끼듯이 시원하게 뿜어내는 분수, 빗물을 머금어 더욱 파랗게 다가오는 잔디광장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싱그럽게 안아 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판교나 구로의 디지털단지가 문득 떠 올려지고..

■ 독일:프랑크푸르트(5.23 ~ 5.24)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중서부 헤센주에 있는 도시로 원 지명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Frankfurt am Main)이다. 인구는 약 71만 명이다. 라인강 지류인 마인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헤센주 최대의 도시이며,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과 함께 독일의 5대 도시 중의 하나로 행정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적 수도는 이 도시라 할 만큼 독일 경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독일 연방은행이 들어서 있으며, 도이체방크와 코메르츠방크의 본점과 세계적인 증권거래소가 있어 영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세계 2위 규모인 국제공항과 자동차 및 화물수송의 요충지이며, 중앙역은 유럽철도 교통의 중심지이다, 1240년부터 국제무역박람회가 열린 이 도시는 도서와 자동차를 비롯해 1년 내내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호텔 인근에는 기아자동차 유럽본부의 건물이 우리를 반기는 곳이기도 하다.

본 도시는 유럽에서 손꼽이는 현대적 대도시로 초고층 빌딩들이 마천루를 이루고 있고 독일 학술의 중심도시이며, 사회학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발생됐던 곳이며,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며,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도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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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델베르그 고성(Heidelberg Schloss)

비는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유럽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날씨는 거의 매일 잔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구릉지를 거쳐 1시간가량 지났을까.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강이 센 물살을 가르고 강가엔 아름다운 고택과 성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골목길을 지나니 모노레일 역에 도착하였다.

열차에서 내리니 허물어진 고성의 자태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건축 당시의 성은 지금보다 더 높은 산허리에 있었는데, 1537년 낙뢰로 파괴된 뒤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30년 종교전쟁을 비롯한 잇단 전란 및 화재 등으로 황폐해졌으며, 1890년경에 복구가 이루어 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성곽 일부는 허물어진 그대로를 간직한 채 의연히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성을 바라보며 ‘이 성은 유럽을 뒤흔든 모든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왔으며 지금은 그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고 말한 이유를 생각케 하면서.

우리 앞에는 어느새 프리드리히 5세가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를 위해 하루 만에 세웠다는 엘리자베스 문을 지나니 마녀의 이빨자국이 나 있는 문고리의 전설을 안고 있는 허름한 나무문이 나타나고 반쯤 무너져 내려 작은 꽃들이 돋아나 쓸쓸함을 더해주는 성곽들이 눈앞을 가로지른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비롯하여 고대 신들의 모습을 기둥마다 석상으로 세워 놓은 오트하인리히 궁이 비록 전면 형채만 남았다고는 하나 웅장한 자태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이 궁의 1층과 지하에는 18~19세기의 의료용품들이 다수 전시 되어 있는 약제박물관이 있는데, 당시 약사의 사무실, 실험실, 약전, 플라스크 등을 볼 수 있었다.

왼쪽에는 본 성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건물이자 쌍둥이 천사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회색의 루프레이트 궁이다. 그 옆에는 프리드리히 4세 때 지어진 프리드리히 궁이 창과 창 사이로 16개의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들을 조각한 인물상을 보듬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의 지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포도주 술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이 술통은 1751년 선제 후 카를테오도어 때 제작되었다고 하는 데, 높이는 약 7m이며 폭은 8.5m에 이르며 약 221,726리터의 술을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80세까지 장수하였으나 의사가 건강을 위해 술을 끊어야 한다고 하자 바로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궁 뒤편으로 돌아가니 시원하게 펼쳐지는 하이델베르그 시가지가 펼쳐진다. 멀리 다리건너 철학자의 길이며 도시 자체가 대학이라고 얘기하는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대학 본관, 숲속에 잠겨있는 듯한 별장들, 아래 골목의 가지런한 옛집에는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스토리를 안고 있고, 해마다 이 성의 축제인 6월~8월까지는 이 영화의 주제가인 Mario Ranza가 부른 ‘Drinking Song’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

못내 아쉬웠던 것은 시간상 수많은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성의 윗자락 넓은 정원에 자리하고 있다는 괴테의 흉상과 괴테가 시상을 떠올리곤 했다는 석조 벤치를 보지 못했으며, 유럽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1386년 설립), 철학자 헤겔이 교수로 재직했고, 노벨상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했으며, <학생감옥>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발길을 돌리니 하우프트 거리 끝에 자라잡고 있는 마르크트 광장을 두고 유서 깊은 중세의 두 건물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1398년에 선제후 루푸레이트 3세 때 시작하여 1441년에 완공된 성령교회와 1701~1703년에 지어진 시청 건물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은 첨탑과 교회 1층에는 특이하게도 십자가 등 성물과 여행자들을 위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구멍가게들이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인구 13만이 거주하는 하이델베르그 시청은 옛건물 그대로 소박하게 꾸려져 있었다. 시민들에게는 결혼식 업무로 가장 친근하게 접한다고 하며, 입구의 민원실에도 2명의 여직원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근무하고 있을 뿐, 우리 구청의 민원실처럼 붐비거나 밀집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연 3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시청의 분위기는 너무나 평범하고 무덤덤한 관공서의 모습에서 우리 의원들이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관사와 삼천사와 한옥마을을 아우르는 한문화 특구로 지정된 북한산 자락, 그리고 옛 기자촌 자리에 <국립 한국문학관> 유치를 위해 온 구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우리구의 현실 앞에 저들의 무궁무진한 스토리의 감동들은 끝내 부러움과 허상만으로 간직되지는 않기를 소망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 재래시장(Kleinmarkthalle)

실질적으로 유럽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가 재래시장이여서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곳이다.

‘마음이 머무르는 너른 공간’이라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깔끔한 나라 독일답게 백화점보다 더 밝고 깨끗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000여 평 규모의 터널형 창고처럼 보이는 외부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가지런하게 잘 정리된 가판의 모습, 연파란 점박이 무늬의 세련된 바닥이 우선 부드러우면서도 신선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입구의 오른쪽에 들어선 꽃가게에는 어여쁜 꽃과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조목조목 포장된 꽃 중에는 수입된 꽃들이 많다고 하는 데, 가격은 다른 공산품 등의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1~2유로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왼편에는 카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꽃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1층에는 육가공품 및 고기류를 비롯하여 과일, 채소, 면류, 제과, 제빵, 건어물, 카페, 꽃시장, 서점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에는 생물생선 코너, 식당, 카페, 술집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조립식 가판의 주요 상품들은 모두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진열하였고, 채소류나 신선도가 필요한 물건들은 예쁘고 깔끔한 대나무 바구니에, 견과류나 반찬 등은 단아한 쟁반류에 담아 진열함으로서 고객들을 한껏 유혹하는 것 같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시장의 맨 끝에 위치한 정육점에서 순 우리말로 불고기, 갈비, 삼겹살, 로스소꼬리 등을 판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프랑크푸르트의 영웅이었던 차범근 선수도 이 가게를 많이 애용하였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괜스레 따뜻한 친근감이 들기도 하였다.

평일이라 이용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중년 남성들이 많았고, 오른쪽 벽면에는 두개의 의자와 흰 테이블, 또는 서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두어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실용성의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점과 여유롭게 확보된 통로엔 우리의 재래시장과 달리 노점상을 찾을 수 없어 넉넉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대림시장, 대조시장, 연서시장, 신 응암시장 등 많은 투자를 해온 우리의 재래시장들을 떠올리면서 뭔가 아쉬움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은 두고두고 개선해야 할 숙제가 아닐까?

◈ 마감하며

여행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여운과 감동과 즐거움과 슬픔과 추억과 다짐을 새기게 한다.

우리보다 수세기 앞서 경제를 부흥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서구 열강들의 문화와 산업과 도시와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가끔씩 스스로의 테두리를 거두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시뿌연 먼지로 얼룩졌던 런던 시가지가 맑은 태양 빛으로 거듭났고 오늘도 세느강의 유람선은 파리의 에펠탑과 노트르담 성당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통일의 자신감속에 프랑크푸르트의 자동차와 도서 박람회는 지속적 발전을 기약하지만, 템즈강과 세느강, 라인강을 바라보면서 대처와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를 떠올리고 셰익스피어와 빅토르 위고, 괴테의 작품을 사랑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더욱 찡하게 감동시킨 것은 옛것의 가치가 황금을 낳고, 신·구 조화는 평화를 낳으며, 재생도시들은 미래를 약속한다는 저들의 진정한 저력 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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